45년만의 해우(邂逅) | 현영한 목사 | 2024-1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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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름 땡볕 무더위가 매일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던 어느 날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답답한 여름을 지내고 있던 때, 뜨거운 사막 한 가운데서 보인다는 ‘신기루’ 같은 소식을 받게 되었다. 45년 전,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미국으로 이민 갔던 내 친구 JP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2. 사춘기가 시작 될 무렵 같은 반 친구이자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는 한 참 미국 이민 바람이 불던 그 때 내 친구 JP도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의 부모님이 미국 이민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란 말을 수 개월 전부터 듣긴 했지만 정작 내 친구와의 긴 이별은 “잘 있어라 친구야,,”라는 덤덤한 말과 함께 내민 그의 손을 꼭 잡고서야 실감이 났다. 중학교 2학년, 사춘기 감성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던 때라 친구와의 이별은 더욱 강한 우정의 다짐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절대 서로 잊지 말자고” 굳은 약속을 몇 번씩이나 하고 나서야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후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에게 첫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서 온 편지 봉투를 받아본 나는 영어로 적힌 친구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조금 낯설었지만 오른쪽 상단에 붙어있는 두 장의 큼직한 USA 우표를 보니 정말 내 친구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우리는 굳은 약속대로 안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답장 한 번 쓰고 나면 한 학기가 끝날 때 쯤 다시 편지를 받게 될 정도의 시간이 걸리다 보니 평생 잊지 말자던 굳은 약속은 일 년도 못 가서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추억의 옷장 안에 굳게 묻히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집보다 교회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던 나는 결국 목사가 되었다.
3. 나의 큰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당시 초고속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우리 대한민국은 갑자기 IMF라는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다. 달러 환율은 치솟아 오르고 있었고 도산 하는 기업들이 줄지어 생겨나면서 많은 직장인들은 힘겨운 삶을 감내해야만 했던 때에 온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도 놀랐고 세계도 놀랄만한 단결력으로 힘 있게 극복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때를 지내고 있던 중 나는 내 인생 가운데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갑자기 떠나게 되었고 30대 중반의 젊은 목회자로 미국에서의 이민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코 녹록지 않았던 미국에서의 정착 기간이 지날 무렵, 갑자기 나는 오래전 미국 이민을 떠난 내 친구 JP의 소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왠지 그가 살았다 던 캘리포니아에 가면 내 친구를 만날 수도 있을 것도 같았고 지인들을 통해서 금방 내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기면서 틈나는 대로 그 친구를 찾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내 친구 이름과 그가 처음 살았던 곳이 캘리포니아주(State of California) 외에는 아무런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를 금방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렸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내 친구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당장이 아니라면 좀 기다리면서 언젠가는 미국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힘겨웠던 이민 생활 25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4. 어느새 나는 환갑의 나이를 앞두고 또 다시 내 친구 JP가 생각이 났다. 이러다간 정말 만나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궁금해 하다가 우연히 엘에이(Los Angeles) 한인 포털 사이트에 ‘만남의 광장’이란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궁금해서 열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 헤어졌던 사람을 찾는다는 글들이 제법 보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도 45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내 친구 JP를 찾는다는 글을 올렸었다. 하지만 별 큰 기대 없이 올린 글이어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며칠 뒤 중학교 후배라는 사람이 내 친구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내 연락처 남겨준 것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왠지 내가 찾는 그 친구의 전화번호라는 확신이 들면서 나는 바로 전화를 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지나고 “Hello~”라는 약간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45년 전 나에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미국으로 떠나갔던 내 친구 JP임을 단번에 알아 봤고, 그 친구 역시 내 이름과 성을 바꿔 부르긴 했지만 바로 자기 절친 이었던 ‘나’임을 금방 알아보고는 서로가 너무나 반가워 난리가 났었다.
5. 세상에나,, 45여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중학생 시절, 그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우리는 그렇게 해후(邂逅) 하였고 벽장 안에 묵혀 뒀던 옛날 헌 옷들을 꺼내 입어보듯 우리가 기억하는 별별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개구 졌던 중학생들처럼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또래 들 사이에서 비교적 힘 좀 썼던 나는 내 친구 JP가 사는 동네 어떤 까칠한 놈이 자기를 자꾸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난 주저함 없이 그를 혼내주려고 마음을 먹고 그의 집까지 찾아갔었다. 당시 우리들의 우상이었던 세계적 무비스타 ‘이소룡’이 “아 오~~” 괴성을 내면서 휘둘렸던 ‘쌍절곤’을 내 오른 팔 겨드랑이에 끼어 넣고 비장한 각오로 그 놈이 사는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려올 정도로 쿵쾅거렸다. 소문으론 그 놈도 제법 쌈 좀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일단 큰 소리를 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난 그 놈을 불러내기 위해 그의 집 대문 앞에서 당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놈이 겁을 먹은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또 다시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열리지 않고 “아직 그가 집에 오지 않았다~”라는 그의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녹슨 철 대문 너머로 들려왔을 때 나는 마치 평화의 소식을 전해 주었던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쿵쾅거리며 뛰고 있던 나의 심장은 시원한 얼음 물에 담겨있던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시원함이 느껴졌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큰 아쉬움의 표정으로 만들고는 호기(豪氣)스럽게 내 친구 JP와 함께 빨리 집으로 돌아섰다. “그 놈 정말 오늘 운이 좋았어!”라며 우쭐거리던 내 친구는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내가 꽤나 멋진 의리의 친구였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6. 그랬던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면서 한 동안 몇 번의 손 편지로 소식을 나눴지만 얼마 안 가서 영영 연락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그 후 나 역시 잊고 지내다가 30대 중반이 되어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지게 되었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 JP를 그리워하며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펜데믹(pandemic) 사태로 지치고, 뜨거운 여름 더위에 더 지쳐있던 어느 날 내 친구 JP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난 무슨 근거였는지는 몰라도 나보다 학교 성적이 앞섰던 내 친구는 엘에이 근교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어디에서도 그 친구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게 되면서 이젠 영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하나로 40년이 넘게 소식조차 모르던 내 친구와 연락이 되다니,, 너무 기쁘면서도 약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7. 이렇게 다시 만난 내 친구 JP는 날마다 오전이면 나에게 전화를 해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매일 아침 드라마처럼 들려주었다. 특히 자기보다 13살 연하인 젊은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자랑 하기에 은근히 부러워하는 척도 해주면서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온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의 기적 같은 해후(邂逅)를 그렇게 매일 풀어갔었다. 내 친구 JP는 내가 상상했던 의사나 변호사가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잘 나가는 식당 비즈니스로 큰 성공을 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상세히 전해 주었다. 물론 그 친구와 가족 역시 처음 미국에 이민 와서 많은 고생을 했었지만 부모님이 시애틀에서 데리야키(Teriyaki) 식당을 하면서 유명 맛 집으로 소위 ‘대박’이 나게 되었다고 했다. 식당이 너무 잘돼서 내 친구도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식당 사업에 뛰어 들어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고 7개의 체인점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참 희한했던건, 그 친구가 캘리포니아 어딘가에 사는 줄 알았었는데 내가 6년 동안 목회를 했던 시애틀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지역에서 서로 살고 있었는데도 서로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그 후,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산호세(San Jose)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큰 일식당을 개업 했는데 얼마 안가서 바로 식당 건너편에 구글(Goole) 회사가 들어오면서 또 한 번 큰 성공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인생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떠버리기도 했다. 지금은 셰일가스(shale gas) 개발로 경제적 급성장을 이루고 있는 노스다코타(State of North Dakota) 주에서 또 한 번 큰 일식 식당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고 근처에 새 호텔(Hotel)도 건축하고 있다고 하면서 공사 중인 사진도 보내 줬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친구가 하는 사업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렇게 큰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내 친구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내가 상상했던 의사나 변호사가 아닌 성공한 사업가가 된 것이 너무 대견스러워 했고, 내 집사람을 비롯해서 주변에 사람들에게도 마치 나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자랑하기도 했었다. 더욱 반가웠던 건, 내 친구 JP도 한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닥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말에 더욱 감사했고, 그 역시 내가 한인교회 목사인 것에 대해서도 놀라면서 나의 경제적 상황까지도 세심하게 묻기도 했다. 가난한 이민 목회자 형편이 좋았을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 두 딸들이 다 장성했고 나 역시 큰 고생 없이 잘 지내고 있다며 말했지만 한 편으로 그렇게 세심한 것까지 관심을 가져준 친구가 고맙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성공한 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찾았던 내가 기특해 보이기도 했다. 내 친구 JP는 앞으로 자기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했고 당연이 난 그러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45년 전 헤어지면서 굳게 약속했던 우정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8. 아침이면 어김없이 내 친구는 출근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한 번은 며칠 동안 들떠있는 나에게 자기 아들이 미국 석유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내년 쯤 아들이 시작하는 스타트업 회사 주식을 사라고 하면서 나중에 큰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권했다. 하지만 난 가난한 목회자라 그런 주식에 투자할 돈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고 정중하게 사양을 했었다. 그러나 속으로 은근히 못이기는 척 하고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이름이나 알아 뒀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후 한 주 동안 매일 오전이면 내 친구 JP는 늘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그 때마다 자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해주었고 난 약속한대로 그 친구를 위해 매일 저녁때면 두 손 모아 내 친구의 건강과 그가 하는 사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늘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 특히 그 친구가 며칠 뒤면 일본에 가서 식당 비즈니스를 위해 직접 구매한 장비들과 일본 술(사케)을 미국으로 보내기 위해 떠나는데 이 모든 사업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목사인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었다. 엉겁결에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나는 나의 주(主)님께 내 친구의 주(酒)님이 미국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이 과연 맞나 싶어서 그냥 넘어갔다. 내 친구 JP는 출장 가는 길에 한국도 들려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돌아 올 예정이라고 하면서 보낸 장비와 물건들이 워싱톤주(State of Washington)의 항구 도시이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타코마(Tacoma)에 도착하면 그때 서로 만나자는 약속까지 했다. 난 나의 두 딸이 시애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했고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만남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려지기도 했다.
9. 그런데, 일본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는 내 친구 JP에게 갑자기 장문의 글이 ‘카톡’으로 왔다. 자기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20만 달러 정도의 식당 장비와 일본 술(사케)을 미리 주문 생산을 해서 준비했는데 이것은 개인이 선적해서 미국으로 보낼 수 없고 미국에 있는 무역 회사를 통해서만 보낼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 미국 무역 회사랑 연락 중이라는 소식이 온 것이다. 게다가 그의 젊고 예쁜 부인은 장인과 장모님을 모시고 쿠바 여행 중이라서 아내와도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말을 그토록 자세하고 장황하게 알려주었다. 난 속으로 “내 기도가 많이 부족한 건가,,” 라는 자책감도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니, 그렇게 큰 사업을 하는 놈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그 많은 물건을 주문을 했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잘 모르는 상황이니 그런 어려움을 당한 친구 소식을 듣고는 함께 마음 조리며 모든 일들이 잘 진행 되기 만을 기도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아침저녁으로 카톡으로 자기 근황을 알려 주면서 쿠바 여행 중인 자기 아내에게 연락이 안 온다고 나한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자기 아내가 미국 무역 회사에 계약금을 보내줘야 되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푸념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마도 쿠바 지역엔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니 너무 염려 말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위로를 했다. 10. 내 친구가 일본에 체류한지 3일째 된다는 금요일 오전이었다. 다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이 친구가 얼마나 급했는지 다짜고짜 나에게 다음날 토요일까지 미국에 있는 무역 회사로 통관 비용을 보내 주지 않으면 자기가 큰 낭패를 겪게 된다고 하면서 $14,000 달러를 나에게 대신 보내 달라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여행자 수표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어쩌고저쩌고,”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자기가 지금 일본에서 돈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보러 이 돈을 대신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나에게 보내줄 수 있는 상황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보내라는 식이었다. 게다가 수취인의 은행 정보를 보니 미국 무역 회사가 아닌 한국 사람 이름으로 돼 있는 것이다. 도대체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14,000 달러는커녕 $1,400달러도 통장에 없는 나에게 그런 큰 돈을 갑자기 보내라니?”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조건 보내라고 하면 어느 누가 선 듯 그 거액의 돈을 보낼 수 있겠는가? 나는 너무 황당하기만 했다. 그래도 난 차분히 내 친구 JP에게 내 사정 이야기를 했고 지금 형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내 딴에는 그 친구의 맘이 상하지 않게 잘 설명을 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 한 시까지 무역 회사에 돈이 들어가야 자기가 일본에서 물건을 보낼 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 가면 바로 빌려준 돈도 갚고 크게 보상까지 해주겠다고 하면서 계속 문자가 오는 것이었다. 난 그제야 먼가, 싸~ 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11.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45년 만에 만난 친구한데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가 분명히 그저 소박한 시골 한인교회 목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무조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좀 마련해서 꼭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일인지, 도무지 납득이 안됐다.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이제야 뭔지를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보이스 피싱’ 이었다면 야단이라도 한 번 치고 끝냈을 텐데,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찾았던 오랜 친구가 너무나 어설픈 상황 극을 만들어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친구의 사정은 잘 알겠지만 난 지금까지 모든 경제권은 내 집사람이 가지고 있고 그런 돈이 있어도 아내 허락 없이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전했고 그 뒤부터 계속 오는 그의 카톡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답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 친구도 갑작스럽게 무리한 부탁을 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미국에 살면서 그만한 돈($14,000)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냐고 갑자기 비아냥거리듯 말을 하고는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나는, 혹시라도 그 친구의 말이 다 맞는 상황이었고 정말 나밖에 그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나 스스로에게도 의심을 해보았다. 만일 그랬더라도 그만한 돈은 보낼 수는 없었겠지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우정은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가 보내준 사진들과 그가 나열한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처음부터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내 판단이 잘못일지 몰라서 가깝게 지내고 있던 지인들에게 카톡 내용을 보여 줬더니 읽자마자 바로 나에게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이제야 알게 되었냐고 예순의 나이 헛 먹은 거 아니냐고 도리어 핀잔을 들었다.
12. 중학교 2학년, 아직 앳된 얼굴에 불긋불긋 여드름이 피어나던 그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의 극적인 해후(邂逅)는 45년 동안 간직해둔 나의 소년 시절의 추억을 산산이 깨뜨리게 한 기막힌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 근데 참 희한한 건, “그 놈, 지금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 그렇게 어설픈 사기극으로 햄버거 하나 제대로 사 먹을 수나 있겠나,,” 별 별 생각을 하면서 헛웃음을 참아내며 새벽 기도의 시간을 조용히 맞이하였다.
13. 이 일이 있은 후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갑자기 네브래스카 주(State of Nebraska)에 살고 있다는 어느 한국 중년 남성에게 전화가 왔다. 목회자인 나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일이지만 이 남성 분은 처음부터 나에게 다짜고짜 “혹시 40여 년 전 중학교 때 헤어진 친구를 찾는다는 글을 포털 사이트에 올린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나와 똑같이 미국에 이민 온 오랜 친구를 찾기 위해 한인 포털 사이트에 올렸다가 크게 사기를 당할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의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에게 사기를 당할 뻔했다고 하면서 얼마 전 새로 바꾼 최신 삼성 스마트폰 안에서 그의 침이 마구 튀어나올 것 같은 열변을 늘어놓으시고 끊으셨다.
결국, 그 사람은 45년 전 헤어진 내 친구JP도 아니었고 그저 오랜 세월이 지난 기억들이기에 중학교 2학년 때 함께 다녔던 중학교 이름만 알아도 충분히 내 친구처럼 흉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친구가 세월이 흘러 어떻게 변했는지 얼굴한 번 보고 싶어 비디오 콜로 통화 하자고 했던 나의 부탁을 매일 아침 ‘운전 중’이란 말로 얼버무렸던 그 이유와 그의 ‘카톡’에 사진 한 장 없었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허술한 게 너무 많았는데도 전혀 의심한 번 해보지 않고 웃고 떠들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도 참다 못해 한 마디 던진다. “잘나가는 친구 둬서 참 좋으셨는데,, 이제 우째요~” “참 내, 누가 좋다고 했나? 잘 됐다고 했지!” 암튼, 내 친구 JP가 아닌 것이 너무 다행이어서 안도의 한 숨이 나오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친구를 찾는 것 보다는 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찾아 고이 간직하는 편히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야만 했다.
현영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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